시위대(侍衛隊)는 1895년(고조 32) 칙령(勅令) 120호의 반포에 따라 편성된 군대로 군부대신의 감독 아래 궁내의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그 편제는 1개 연대(2개 대대) ·1개 대대(2개 중대) ·1개 중대(3개 소대)로 하였으며 연대에는 연대장(副領)을 비롯, 대대장(參領) 2명, 부관(副官:副尉) 2명, 향관(餉官:正尉) 2명, 중대장(正尉) 4명, 소대장(副尉:參尉) 14명이 있었다. 양번(兩番)으로 나누어 매 3일마다 교대하여 궁내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군악대도 부설하였으나 창설 3개월 후인 8월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중앙군(中央軍)을 러시아식으로 개편하면서 1897년(광무 1) 3월 시위대(侍衛隊)를 다시 설치하였다. 시위대는 총원 1,070명으로 200명을 1개 중대, 5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제하였는데, 대대본부에는 대대장 1명, 부관(부위) 1명, 향관(軍司) 1명, 정교(正校) 1명, 부교(副校) 1명을 두었으며, 중대에는 중대장 1명, 소대장 4명, 부교 ·참교 14명, 병졸 180명을 두었는데, 10월 1개
여당인 한나라당이 네티즌들로부터 어느덧 한날당으로 불리고 있다. 군병과 중에는 보온병(保溫兵)과가 있다느니, 보온병이 폭탄이거나 핵폭탄이라는 등 군 면제 행불 상수로 불리는 여당 대표의 군대 무기 무지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조롱은 군면제정권의 패러디물이 홍수를 이루면서 그 끝을 모르고 행해지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내년도 예산 날치기는 서민 무시하는 불신정권에 이어 복지예산을 대폭 누락시키면서까지 굳이 ‘4대강 주역’ 水公 특혜 시행령을 몰래 개정하는 등 ‘몰래정권’이란 평가를 들어도 싸다. 아울러 날치기 전 포항 등 특정지역에 선심성 특혜 예산, 일명 형님예산이니 과메기예산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으니, 그들은 무슨 낯으로 국민을 대할까? 아울러 불교계를 화나게 한 거짓말 등 이 정권은 거짓정권, 몰래정권, 불신정권으로 사방에서 엄청난 비난을 듣고 있다. 가히 자폭 수준이다. 그것도 자업자득이니 하루빨리 못난 권력 사라졌으면 할 국민이 많을 것이다. 이처럼 순리를 거부하고 급하게 예산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급체한 꼴이다. 국민 세금을 어찌 그리 영유아 접종 주사비용마저 없애고 애들 밥그릇 잡아채가면서까지 후안무치한 바보짓을 노가다 십장 일 처리하듯 하는가
현 정권의 밀어붙이기 식 날치기 예산 배정이 꼭 치매환자 같다. 국회에서 격투기장을 방불케 한 막무가내 식 한나라당에 의한 내년도 예산의 날치기 통과는 원척무효로 함이 옳을 것이다. 세계인에게 창피할 정도로 매년 12월을 장식하는 삼국시대 정치만도 못한 예산안 처리가 너무나 짐승사회 같다. 토론과 대화에 의해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던 신라의 화백회의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횡포와 폭력을 무기로 국민 세금 가지고 과메기 지역 형님 예산 특혜라는 해괴망측한 예산안 날치기 통과는 정말 있을 수 없는 함량미달의 탐욕과 일그러진 지역주의가 빚은 한편의 블랙코미디에 불과하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3년간 형님예산이 1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예산 배정이다. 몇 년 간 배부르게 예산을 배정받은 형님은 오히려 간신들이 아부하면서 비린내 풀풀 나는 과메기 예산에 특혜를 주려해도 이를 거절했어야했다. 폭식하다가는 설사하거나 꼭 뒤탈이 있기 마련이다. 아니, 정권자체의 기반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 아울러 이 정권은 입으로만 친 서민정책이니 뭐니 떠들어도 뚜껑을 열고 보면 언제나 립 서비스에 불과했음이 결과물로써 드러난다. 이번에도 영유아예방접종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10월 상순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둥근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천제를 봉행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며 환구제(圜丘祭)는 10세기 고려 성종(成宗) 대에 제도화되고 조선 세조(世祖) 대에 폐지되었으며 1897년 고조(高祖)는 대한제국(Daehan Empire)을 건국하고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의해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황단을 축조하고, 10월 12일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황단에 나아가 환구제를 봉행하고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광무 원년 백악과 목멱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제천단 황단(皇壇)을 축조하였으며 1층은 장광이 144 척이며 둥글게 돌로 쌓아 석 자 높이로 쌓았고, 2층은 장광이 72 척이며 석 자 높이로 쌓았고, 3층은 장광이 36척이며 석 자 높이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바닥은 벽돌을 깔고 황단(皇壇) 주위를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세웠고 남문은 문이 셋이다. 1910년 불법 무효한 경술늑약에 의한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 후 환구단의 건물과 터를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훙서(薨逝) 후에 묘호(廟號)가 올려진 조선의 추존(追尊) 왕은 모두 9명이다. 추존 왕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의 신분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아버지, 그리고 태조의 4대 선조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이다. 태묘(太廟)에 신위를 모셔서 왕위에 오른 왕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왕릉의 능제에 맞게 규모를 키우거나 석물을 추가하여 능도 더욱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삼촌의 왕위를 계승한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은 세조의 맏아들로 의경세자에 봉해졌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예종 역시 1년 남짓한 재위 기간을 채운 뒤 병사하였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과 잘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대비는 둘째 아들인 잘산군으로 하여금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고, 그가 9대 왕인 성종이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대한민국이 국격 낮고 위험한 장사치 나라로 급변한 것 같다. 아랍에미레이트로부터 원전을 수주하면서 군대를 덤으로 끼워 넣기 한 것도 뒤늦게 드러나고,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에 공병부대를 동원함은 물론 속도전으로 밀어재끼는 탓에 군인이 사고로 죽는 등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몰염치 정권은 그 끝을 모를 정도로 엉뚱한 곳에 저돌적이다. 이러한 정권은 양심세력이 하루빨리 퇴진시켜야 옳다. 아니 독불장군 식 막무가내 정치를 하는 세력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모든 국민이나 정치인이 나서 반드시 퇴출시켜야 이 나라 금수강산이 보전되고, 백성이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안보를 등한시 하는 정권은 여, 야나 우익, 좌익의 이념을 떠나 이미 공공의 적이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안보를 장신구로 여기는 정권은 나라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돈으로 바꾸려는 장사치에 불과하다. 입에 돈 잔뜩 물고 적군에 죽을 운명이다. 어찌하여 군 면제정권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보다도 경제적 이득, 그것도 재벌에 편중되는 온정하나 없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신봉하는가. 복지와 군 장비 예산은 삭감한 채 4대강에 올인하는 이상한 정권에 많은 사람들이 신물을 낸지 오래다. 중요한
대한제국 황제릉(皇帝陵) 홍릉(洪陵)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는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 천장산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붕어(崩御)하자 그 해 3월 4일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해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함께 합장하였고 봄 ,여름,가을,겨울의 사시,동지(冬至) 후 3번째 술일(戌日)의 납일(臘日)과 한식,단오,중추의 속절(俗節),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친제(親祭)를 봉행했다. 초대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은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으며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전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석물이 참도와 침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고 문인석, 무인석,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이 순서대로 참도(參道)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릉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순종 융희제와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閔氏)
왕릉,황제릉은 모두 42기인데 북한 개성에 있는, 태조의 첫 번째 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인 제릉(齊陵)과 조선의 2대 정종 및 그 비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인 후릉(厚陵)을 제외한 40기가 대한민국에 남아 있다. 국왕이나 왕후는 5개월만에 왕릉에 묻힌다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명시되어 있으며 국왕이나 왕후가 승하(昇遐)하면 곧바로 능호(陵號)를 정하고, 왕릉으로 삼을 만한 좋은 터를 마련한 뒤 왕릉의 조성 공사에 돌입하여 장례를 치르기 전에 완공하였다. 반정(反正)을 통해 국왕이 된 인조는 즉위한 뒤 자신을 낳아준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면서 장릉(章陵)으로 격상되었다. 단종의 능은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의 신분으로 졸했기 때문에 노산묘(魯山墓)로 불리었다가 숙종 대에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장릉(莊陵)으로 조성되었으며 단종의 능은 무인석(武人石)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태조의 두 번째 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태조가 승하(昇遐)한 후 태종에 의해 신덕왕후의 능이었던 정릉(貞陵)이 폐릉되었다가 현종 대에 이르러 태조의 계비로 인정되어 다시 복위되고 능도 왕릉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국왕으로 재위하였다가 실정
요즘 나라가 어수선하다. 정부와 위정자는 국민 신뢰를 먹고살아야 하거늘 여당 내 일부 인사는 물론 국가 정책의 중요 결정권자까지도 금세 들통 날 거짓말로 불신을 자초하여 원성을 사고 있다. 특히 국무위원 중 상당수가 군 면제자로 구성된 전무후무한 요상한 정권에서 연평도 난리 통에 젊을 때 입으랄 때는 행방불명까지 돼 가면서 군복을 안 입더니, 남들은 다 양복입고 다니는 느긋한 나이에 군 야상 차림에 보온병 들고 ‘이것이 포탄 탄피’라며 우겨대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여당 대표인 안상수(네티즌 사이에서 ‘행불’로 유명)씨였다. 과연 그 모습을 보니, 콜라병 들고 요리저리 하늘에서 내린 선물이라며 즐거워하던 부시맨을 보는 것 같았다. 그나마 북한군의 포격으로 불안에 떠는 국민에게 안 대표는 군 면제자답게 쓴 웃음을 선사했다며, 칭찬이라면 칭찬(?)이라 할 비판을 듣고 있다. 마치 상가집에서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안다며 떠벌이는 한 미치광이 때문에 엄숙해야할 곳에서 포복절도하는 격이다. 이에 초등학생을 포함한 많은 국민으로부터 보온병 출신 병역 면제자라며 조롱받는 여당 대표가 불쌍해 보일 뿐이다. 물론 자업자득이지만. 절대 국민 위에 설 수 없는 자들이 어떻게 운
조선 왕비는 간택(揀擇) 절차를 거쳐 책봉(冊封)되었는데 금혼령(禁婚令)을 공포하여 반가의 13-17세 규수들의 혼인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면 반가에서 사주와 함께 부, 조, 증조, 외조의 이력을 기록한 간택단자(揀擇單子)를 예조에 올리면 예조는 간택단자를 모아 국왕에게 올렸다. 왕비의 간택(揀擇)은 왕실의 어른인 대비(大妃)가 주관하였으며 대비(大妃)는 간택단자(揀擇單子)를 보고 그 중에서 가문과 사주가 좋은 규수를 골랐다. 가례도감(嘉禮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간택(揀擇)과 가례(嘉禮)를 주관하게 하였다.조선 왕세자(王世子)는 동궁(東宮)에 거처하였고 왕비는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揀擇)되어 입궁하였으며 세자빈은 왕세자(王世子)가 왕위에 즉위한 후 정식 왕비에 책봉(冊封)되었고 국왕이 된 후에 국혼(國婚)을 하는 경우도 있다. 왕비의 간택(揀擇),책봉(冊封)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납비의(納妃儀)에 의거하여 시행되었다. 납비의는 택일(擇日),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策妃), 명사봉영(命使奉迎), 동뢰(同牢),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왕비수내외명부조회(王妃受內外命婦朝會)의 절차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