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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추적>광주 5.18 때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 했는가? "했다 !"(1)

5.18 광주의 진실 (1)

5월17일 KBS 저녁 9시 “5·18 민주화운동, 인터넷·SNS서 도 넘은 왜곡” 제목의 뉴스에서 민경욱 앵커는 “내일 모레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3년이 되는데. 민주항쟁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국가기념일로까지 지정된 5.18 민주화운동을 두고 요즘 인터넷과 SNS에는 북한군 개입설 등 각종 유언비어들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데 진실은 무엇인지? “ 박지성 기자가 취재한 것을 보도했다.

 

5월13일 TV조선에 장성민 시사탱크에 출연한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임천용 대표(前 북한특수부대 장교)는 “ 광주 5.18 때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한 것”을 북한 지역의 많은 사람이 공공연히 아는 사실을 유독 한국의 몇몇 사람만 모르는 사실에 대해 답답하다고 말했고 그것은 좀 더 한국적 표현을 빌리면“ 복장 터진다” 뜻이었다.

 

한국의 고정관념을 가진 온실 속의 사람들이 말하는“5.18 광주에 북한군 침투는 유언비어” 와 북한 지역의 많은 사람이 아는 상식화 되어 있는 “5.18 광주에 북한군 침투” 이제 그 진실에 접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1980년 5.18 광주에 침투했다가 북으로 도주, 영웅칭호 받은 사람이 탈북해서 지금 한국에 정착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1980년 5.18 광주,북한군이 침투했나? “했다!”

5.18에 관해 거의 박사급인 5.18에 관한 책도 쓴 시스템클럽 대표이며 시스템공학박사인 지만원 박사를 만났다.

                                                                                   

                                                                                                  

박사님,광주 5.18 때 북한군이 침투 했습니까?

  모략전과 도시게릴라전을 전문으로 하는 북한특수군이 확실히 침투했고, 광주 및 전남 18개 시군에서 핵심작전을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한 북한 특수군 규모는 고첩과 10.26직후부터 6개월 동안 10명, 20명, 30명 단위로 침투한 병력을 합쳐 최소한 600명 선이라고 단정합니다.

 

 

- 증거가 있습니까?

 저는 2008년 10월, 1995-97년 사이에 사회를 요동치게 했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수사 및 재판기록 18만 쪽을 정리하여 다큐멘터리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1,720쪽(4권)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2010년 8월에는 수사기록, 북한의 대남공작역사책들, 북한의 정기간행물들, 통일부 분석자료들을 모두 종합하여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확실하게 왔다는 결론을 낸 “솔로몬 앞에 선 5.18”(280쪽)을 내놓았습니다. 이 책은, 제가 36명의 탈북인들이 펴낸 수기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힌트를 얻어 확실한 문헌들을 찾아 정리-분석한 것입니다. 북한특수군은 반드시 왔고, 600명 규모가 온 것이 확실시 된다는 분석입니다.  

 

5.18단체들은 제가 탈북자들의 “카더라” 통신만 믿고 북한특수군이 왔다고 주장한다느니,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600명씩이나 어떻게 올 수 있느냐느니 반발하지만 이러한 반발은 억지일 뿐 논리가 아닙니니다. 5.18세력은, 광주의 피해가 반드시 최규하 정부와 공수부대에 의해 발생했다고 해야 5.18의 명예가 존중되고, 북한특수군에 의해 발생했다고 하면 5.18의 명예가 훼손된다는 주장합니다. 그들이 저를 두 차례씩이나 고소한 것은 바로 이러한 주장에 터를 잡았습니다. 도대체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는 안보적 이슈가 어째서 5.18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인가요? 이 해괴망칙한 주장은 북한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나 내놓을 수 있는 주장이며, 5.18세력이 빨갱이 세력이라고 가정할 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매우 불온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tv 대담에서 지만원 박사) 

먼저 광주에 특수군 600명이 왔다고 확신하는 이유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1. 10만 이상이 동원된 야전군 규모의 도시게릴라 작전에 지휘부가 없다는 것입니다.

5.18은 광주시에서만 해도 10일 동안 1개 야전군 규모에 해당하는 10만 이상의 시민들을 총동원하여 벌인 도시게릴라 작전이었고, 전남지역 18개 시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조직적인 게릴라 작전이었습니다. 제주4.3사건을 보십시오. 겨우 350명의 한라산 게릴라를 지휘하는 데에도 김달삼, 이덕구 사령관을 비롯한 지휘자들과 수많은 공산 프락치, 남로당, 민민전 간부들이 줄줄이 포진한 지도-지휘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남지역 전체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한 야전군 규모의 도시 및 지방 게릴라작전에는 광주시민들로 구성된 지휘부가 전혀 없었습니다. 지휘부가 없다면 이 엄청난 규모의 도시 및 지방 게릴라 작전이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이 군사적 판단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5.18폭동에 시민군이 형성되어 처음부터 작전지휘를 했다고 믿고 있지만 1995년에 내놓은 검찰 수사기록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시민군으로 알려진 조직은 5월 25일 처음으로 형성된 ‘학생수습위원회’입니다. 이 조직의 위원장은 전 열우당 의원이었던 김종배였습니다. 5.18세력이 그토록 띄우는 5.18영웅 윤상원(본명 윤개원)은 겨우 김종배 밑에서 대변인으로 임명되었고,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공수부대 대령 출신으로 각색된 박남선(안성기 배역)은 26세의 골재화물차량 운전수로 겨우 상황실장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공수부대를 코너로 몰아넣고 몰살시키기 직전까지 몰고 갔던 5월 19일, 20일, 21일의 화려무쌍한 도시게릴라 작전을 지휘한 시민-지휘부는 일체 없었던 것입니다. 광주의 온 시민들이 존재했다고 믿었던 지휘부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쓴 5.18역사책들을 보면 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고, 심지어는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춘 버스의 차량번호(전남5아3706)까지, 폭도들의 감정까지 매우 자세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북한이 대남 모략목적으로 만든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주인공은 폭동 10일 내내 도망가 있었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었습니다. 또한 북한 자료에는 광주작전에 사용된 전략과 전술까지 기록돼 있지만 남한측 자료에는 도시게릴라전에 사용됐던 북한의 전략-전술이 일체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2. “광주민주화”의 1등 공신, 최고의 유공자들은 누구인가? 초중고등학생들이 23%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사망한 1등공신, 유죄판결을 받은 1등공신들의 직업은 그 90% 이상이 용접공, 석공, 목공, 껌팔이, 구두닦이, 넝마주이, 막노동, 미장광, 방위병, 양화공, 자개공, 샤시공, 도자기공, 식당종업원, 타일공 .. 등 이른바 양아치-기층계급이었습니다. 광주에서도 천대받고 학대받던 사람들이 바로 광주의 1등공신들인 것입니다.  

 

가장 화려했던 작전이 이루어졌던 5월 21일 이후에 사망한 광주시민들은 153명, 이 153명은 5월 21일 이후에 계엄군과 싸우다 죽은 사람들이며 분명한 1등공신들입니다. 그 다음의 1등공신은 누구인가요? 군법회의 제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유죄판결을 받은 283명입니다. 사망한 1등공신 153명과 1심유죄판결을 받은 1등공신 283명을 보태면 436명, 이들이 바로 광주 1등공신의 전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1등공신들은 10대-20대 학생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각지에서 모인 뜨내기 계급들로 군중심리에 부하뇌동을 하거나 협박과 매수를 통해 움직일 수는 있어도 스스로 결속력을 갖추고 스스로 진용을 조직하여 독립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북한특수군의 개입을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입니다. 이 436명으로는 지휘부도 구성할 수 없고, 결속력을 갖추어 조직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5월 21일에 이루어진 세계 최상류에 속하는 ‘600명 정예군의 특공작전’을 과연 수행할 수 있는가요? 절대로 못합니다.   

 

3. 5월 21일 수행된 “600명 정예군의 특공작전”이란 무엇인가? 600명의 정예군은 광주폭동 작전의 키워드입니다. 광주에서는 연고대생 600명이 광주에 투입된다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북한책(광주의 분노, 1985) 35쪽에는 “600명으로 구성된 특수군중의 한 집단”이 5월 21일에 현역부대인 199지원단 무기고를 포함해 수많은 무기고를 털었고, 대량의 폭약과 뇌관을 탈취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1995년 검찰이 발표한 수사결과 보고서에는 600명이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에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및 버스 300여대를 탈취해가지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를 오전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탈취해 5,408정의 총기를 탈취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북한 책에는 6개 무기기가 더 있었습니다. 모두 44개 무기고를 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참으로 신기한 전략이 있었고,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담성이 있었습니다. 이들 600명은 무작정 아시아동차로 가지 않았습니다. 먼저 300명이 20사단 사단 표시가 돼 있는 지휘차량 및 트럭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이 빼앗은 지휘차량과 트럭들을 과시하면서 아시아자동차 직원들의 순종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런 기막힌 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 대한민국 국민 중에는 없었습니다. 모래알과 같은 양아치 계급의 1등공신 436명이 이런 기막힌 발상을 했다?  

 

이들 300명은 5월 21일 오전 8시, 광주톨게이트에 20사단 지휘부가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해 가지고 톨게이트 부근에 매복해 있다가 20사단 지휘부를 기습공격했습니다. 300명이 화염병 등을 던지며 갑자기 달려들자 사단사령부 병력은 혼비백산했습니다. 300명의 정예부대는 20사단 차량 번호가 찍힌 지프차 14대와 20여대의 트럭을 몰고 아시아 자동차로 가서 직원들의 복종을 순순히 이끌어 냈습니다. 자동자공장 직원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장갑차 4대와 300여대의 차량에 키를 꽂아주었고, 이들 600명은 미리 작성된 약도를 가지고 44개 무기고를 향해 뿔뿔이 달려 불과 4시간 만에 2개 연대를 무장할 수 있는 엄청난 무기를 탈취했습니다. 광주시민이, 아니 목공, 석공, 미장이, 양아치 계급들로 구성된 436명이 과연 4대의 장갑차를 몰 수 있고 불과 4시간 만에 44개 무기고를 털 수 있는 것인가요?  

 

4. 80만 광주시민 날려버릴 폭탄을 광주시민이 조립했다? 북한 책과 남한 수사기록에 의하면 이들 600명이 탈취한 8톤 트럭 분의 TNT는 도청 지하실에 쌓였습니다. 누군가가 순식간에 뇌관과 도화선을 조립하여 폭탄으로 전환시켰습니다. 누군가가 지하실에 담뱃불 하나를 던지면 80만 광주시는 히로시마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광주시를 날려버릴 수 있는 이 대담-극악한 짓을 과연 광주시민들이 저지를 수 있을 것이며, 광주시민이 아니 목공, 석공, 미장이, 양아치 계급들이 이런 고난도의 조립 기술을 소유했을 것이며,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조립된 폭탄을 다시 해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당시의 전라도 계엄군에 오직 한 사람, 5급-갑의 배승일 문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은 북한군이 정말로 왔는가에 대한 증거들을 대겠습니다.

1) 166명의 사망자들 중 총상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116명, 이중 69%에 해당하는 80명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당시 계엄군은 M16만 보유했습니다.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쏘았다? 광주는 80명을 광주시민이 쏘았는지 북한특수군이 쏘았는지 양자 택일을 해야 합니다.

2) 1,700명의 죄수와 170명의 좌익수가 수용돼 있는 광주교도소를 장갑차를 몰고 6차례 공격하면서 공수부대와 정규전을 수행했습니다. 광주시민이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면서 교도소를 공격하여 죄수들을 폭동에 가담시키려 했을까요?

3) 12명은 한국국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북한군이 아니겠습니까?

4) 시체가 없이 실종된 사람이 66명, 5.18묘역에는 묘 없이 66명의 이름이 적힌 커다란 비석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필자의 추측으로는 이들이 산 속에 매장됐을 것입니다. 광주시민들이 위장한 북한특수부대원들의 능력 있는 행동에 매료 되어 따라다녔는데 북한특수군은 북에 지령에 따라 5월 23일경 철수했을 터인데 순진한 광주시민들이 퇴각하는 특수군을 자꾸만 따라가다가 특수군이 산중에서 처분-매립됐을 것입니다.

5) 19세 때 특수군 지휘자를 호위하러 왔다가 돌아가 영웅대접을 받다가 탈북한 정 모씨가 지금 분당에 살고 있습니다, 2013.5.15. 오후 4시30분경 채널A를 통해 증언합니다.

  

                          (TV조선에서 방영한 故 황장엽씨의 살아생전 증언)

 

6) 황장엽을 가장 먼저 공작 차원에서 접촉한 사람은 국정원이 아니라 전 월간조선 편집장이었던 김용상이라 합니다. 그는 1996년 황장엽과 김덕홍으로부터 “5.18은 북한이 배후조종하고 계엄군에 뒤집어씌운 사건이고, 그 작전을 기획한 대남부서 사람들이 5.18종료 직후 무더기로 훈장을 받았다”는 요지의 증언을 했고, 이 증언은 2013.4.22. TV조선에 공개방송됐습니다.  

 

7) 북한은 매년 5.18만 되면 1주일 정도 당정 최고 간부들이 주최하여 5.18을 기념하고 추념하고 있습니다. 통일부의 주간정세보고서가 이를 증명합니다.  

 

8) 북한의 최고인 것에는 5.18을 명예로 하사하고 있습니다. '5.18영화연구소' '5.18청년호‘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 ’5.18땅크호‘ ’5.18누에고치반‘ ’5.18작업소‘ 등등 매우 많습니다. 통일부 주간정세보고, 북한 책, 사진, 통일뉴스 등으로 등명돼 있습니다.  

 

9) 전교조 초대회장인 윤영규는 1980년 5월 23일, 실제로 M16과 수류탄으로 부장한 36인무장조를 도청지하실에서 보았고 그들과 긴 대화를 나눴다는 글을 썼습니다. 5월 23일 당시 시민들은 콩가루였지 36인으로 뭉칠 수가 없었으며 5월 23일 현재 시민에 피탈당한 M16은 겨우 7정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양아치들의 언어가 아니라 고도로 자제되고 훈련된 말이었다 합니다. 

 

10) 계엄군이 시외로 도망간 날은 5월 21일 저녁이었습니다. 계엄군이 빠져나가자 5월 22일 아침에는 광주의 유지들이 ‘시민수습대책위’를 구성하였고, 가장 먼저 추진한 사업이 무기반납사업이었습니다. 광주시민이 탈취했다면 절대로 이렇게 빨리 무기반납을 서두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은 600명이 어떻게 경계망을 뚫고 왔을까에 대해 답을 하겠습니다. 북한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해 1968년 1월 21일, 33명(31명이 아닙니다)의 김신조 특공대를 청와대 앞마당에까지 침투시켰습니다. 그해 10월 말에는 123명의 무장특공조를 울진-삼척에까지 침투시켜 이승복 사건을 획책했습니다. 물 샐 틈 없다는 말은 구호일 뿐이지 현실적으로는 거짓말입니다. 분당에 산다는 탈북자가 광주에 올 때는 남북어선에 4개의 엔진을 달고 날아왔다고 합니다.

 

김일성 종합대학을 나온 북한의 여교사는 그의 내연남 안창식이 11명을 이끌고 10.26 직후에 잠수함으로 타고 목포로 잠입하여 슈퍼마켓으로 안내됐는데 거기에는 부마사태에 투입됐던 간첩들 7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로부터 작전지휘를 받았으며 어떤 팀은 땅굴로도 왔다고 증언했습니다. 600명 중 일부는 10.26 직후부터 5.18가지 6개월 이상에 걸쳐 소규모 단위로 내려왔고, 또 다른 일부는 고첩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길 안내를 했다는 고첩들 중의 하나가 비전향장기수 손성모인 것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 김덕홍씨의 증언)

 

- 5.18 에 관한 일로 재판이 걸렸다고 들었는데 결과가 나왔습니까?

 

제가 2008년 1월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역사책의 머리말 시안을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에 올렸습니다. 5.18부상자회 회장 등 5.18단체 간부들이 득달같이 고소를 했습니다. 안양지검 박윤희 여검사가 이를 기소했습니다. 고소-기소 대상의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필자는 10.26, 12.12, 5.18, 김대중 내란음모, 1995~97년에 걸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이 모두에 대한 기록들을 열람하였다. 이 모든 기록들을 보면서 필자는 5.18은 김대중 등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는 1980년 판결에 동의하며, 북한의 특수군이 파견되어 조직적인 작전지휘를 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불순분자들이 시민들을 총으로 쏘는 것은 물론 제주 4.3사건에서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러 놓고, 좌익들이 이를 군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소위 모략전을 반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으로 굳혀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심리적 내전’이 바로 5.18이라고 생각한다."

 

5년이 넘게 1,23,심 재판을 받았습니다.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 선고를 끝으로 1,2,3심 모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예전에는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해야 살아남고 반대의 말을 하면 5.18단체로부터 린ㅌ치를 당하고 구속당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2002년 8월 16일 동아 일보등에 5.18에 북한특수군이 연루됐다는 간단한 문장 하나 썼다고, 안양에서 수갑을 뒤로 채인 채, 6시간 동안 광주로 끌려가면서 광주 광주지검과 서부경찰서 소속의 공직자들로부터 생지옥을 경험했습니다. 때리고 욕하고, 검찰청에 도착해서도 최성필 검사는 제게 욕을 하면서 3시간 동안 뒤로 채여진 수갑을 풀어주지 않고 조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5.18민주화이고 이것이 광주의 야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대법원 판결 결과 국민은 누구나 5.18에 대한 자기 역사관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5.18은 광주만의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광주사람들이 5.18에 대한 다양한 역사규명 노력을 훼방하는 것은 숨기고 싶은 게 있어서이고 보호해야 할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5.18에 대한 제 역사관은 이렇습니다.

 

“5.18은 전라도 반골들을 동원한 최대 규모의 대남공작사로 북한특수군 600명이 참전, 기획 연출한 무장반란사건이다. 제주4.3사건에서처럼 무고한 시민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해놓고, 이를 국가와 군에 뒤집어씌워 국가와 국민을 이간시키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략전이다." 

 

젊은이들이 무의식중에 반국가세력이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교과서의 왜곡된 5.18역사 때문입니다 ‘5.18은 독재탄압에 맞서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을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국가가 국가폭력배인 경찰-군을 시켜 총칼로 잔인하게 죽인 역사’라고 배우는 순간 아이들은 반국가 세력으로 전환됩니다. 5.18단체들은 전남 학생들을 데려다 “5.18체험교욱”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쉴 새 없이 반국가 정신을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빨리 바로 잡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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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 날(4월7일)에 허경영 국가혁명배당금당 대표,‘코로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며
허경영 국가혁명배당금당 대표는 “총선 D-8일인 오늘(4월7일)이 보건의 날인데 코로나19로 정부 기념행사가 연기 된 것”에 유감을 표하고 “오히려 ‘1주일을 보건의 날 기념 건강주간’으로 정해 대대적인 보건 관련 행사를 벌여 코로나로 인한 국민의 보건의식에 경각심을 일으켜야 한다”며 “이 기회에 전 국민이 손 씻기 등 깨끗한 위생생활을 습관화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 시키는 행위들을 반성하고 불편하더라도 친환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허경영 대표> 허대표는 “코로나는 인간의 욕망으로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인간들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했다. 허대표는 코로나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유튜브 공개 강연이나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는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라고 수시로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제안한 ‘코로나 긴급생계지원금 18세 이상 국민들에게 1억원씩 지급’하는 공약이 법으로 제정될 수 있도록 과반수 151석 이상을 국가혁명배당금당에 몰아 달라고 했다. <허대표의 기자회견을 열심히 경청하는 국가혁명배당금당의 당원들> 김동주 국가혁명배당금당 기획조정실장은 “코로나가 인간의 끝임 없는

지금이라도 외국인 입국을 차단하고 대한민국 국민들과 의료진을 보호하라.이은혜 (순천향대 의과대학 교수)
대한민국의 의료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국민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외국인 입국을 차단하라 해외에서 유입된 감염성 질환에 대한 방역관리의 기본 원칙은 ‘해외 유입 차단’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대한의사협회의 7차례 권고를 무시한 채 소위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중국발 입국을 차단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구를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였고 이제는 거꾸로 중국의 33개 성(省)과 시(市), 그리고 18개 자치구에서 각기 다른 기준으로 한국인 입국 시 격리 조치를 하고 있다. 최근 이탈리아를 선두로 유럽 전역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하고 있는데 애초에 중국발 입국을 막지 않았던 문재인 정부는 이제 와서 유럽발 입국을 차단할 명분이 없다. 궁여지책으로 22일 0시부터 유럽발 입국자에 대한 ‘특별입국절차’로서 코로나바이러스-19 검사를 의무화했다. 시행한 첫날인 22일 입국한 1,442명 중에 무려 152명이 의심 증상을 보였고, 23일 신규 확진자의 21.9%가 유럽 등에서 입국한 ‘사람’들이며, 이는 전보다 4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박능후 장관 말대로 문 열어놓고 모기 잡겠다는 것인데 온 국민이 모기에 왕창 뜯겨서 죽어 나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