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동거한 이화여대 출신 이현란의 사진(앞줄
맨 왼쪽). 박정희가 肅軍 수사를 받고 살아나온 직후
그의 용산 관사 현관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앞줄 가운데는 박정희의 바로 윗 누님 박재희 씨,
그 오른쪽이 박정희다. 수사를 받고 나온 직후라
박정희의 모습이 다소 초췌해 보인다.-출처 조갑제 닷컴에서
▲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이현란 역으로 출연한 배우 김애경
기자는 최근 강남의 유명한 기도원에 갔었는데 그 원장 목사님이 말하기를 지나가는 말로 " 박정희 대통령의 첫 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했다.
박 대통령의 첫아들이라고? 박지만 씨가 아들인데 또 다른 아들이 있다고?
박정희 대통령의 첫 딸은 최근에 세상을 떠난 김호남씨 사이의 박재옥씨이고
그러면 그 첫 아들은 누구냐? 기자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 원장 목사님은 그 사람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상당히 중요한 말이라 기자가 재차 방문하여 물었을 때 어느 장로가 와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이것 뭐 스무고개 하나? 커다란 퍼즐을 맞춰야 하나?
헤어진 가족들, 이산가족 찾기에 기자가 뛰어 들어?
지금 대한민국이 위기이다.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인물 부족이다.
인물을 찾기 위해 가능성 1%라도 있으면 기자는 찾아야 할 형편이다.
그 아들은 육영수 여사와의 소생은 아닌것 같은데 그러면 그 아들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
기자는 박정희와 이대생이라는 글을 어디에서 본 것 같아 찾아보니 상세한 내용들이 이미 나와 있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청년 박정희와 이대(이화여대)생 이현란 이야기 개요>
박정희 대통령이 대위 시절에 친구 박경원 결혼식에 갔다가(1947년) 들러리로 나온 미모의 여대생을 만났다.
박정희는 한 눈에 반했다.
그 미모의 여대생 이현란씨는 원산의 갑부 딸로 북의 공산당이 싫어 남쪽으로 온 사람이고 그래서 박정희 얼굴 보다는 국군 장교가 좋아서 박정희를 가까이하게 되었고 (약혼식: 1947년 겨울로 추정,1948년: 동거 시작, 1948년 11월, 박정희의 옥중 메모, 1950년 2월 6일 가출)
*1948년 11월, 이현란씨에게 보낸 박정희의 옥중 메모: "얼마 후 김창룡이가 왔어요. 경위를 설명하고 미스터 박이 메모를 주라고 하더라면서 건네줍디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 주라. 7기생의 육사 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도 하고 아침에 국방부에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띰해 주더라. 내가 얼마든지 차 타고 도피할 수 있었는데,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건 나한테 얼마나 불리한 줄 아나?' 한 여인 때문에 안 갔다니… 그러나 난 괘씸했어요. 그것까진 또 괜찮아."-조갑제 닷컴에서-
그런데 청년 대위 박정희가 군내 남로당 숙군 작업에 걸리고 서대문형무소에 가면서 박정희를 싫어하게 되었고 박정희를 버렸다는 여성이다.
그가 이현란씨다
박정희와는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고 아이도 임신했었고 출산도 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그런데 그 뒤가 사뭇 궁금하다.정운현 기자( 2011년 까지 대한매일(서울신문 전신) 에 있다가 오마이뉴스로 감)가 2011년에 그동안 잊고 있다가 12년 전 (1999년 경)에 온 편지 뭉치를 공개 했는데 그 속에는 놀라운 일들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박정희가 용산 관사에 있으면서 남노당 군사책으로 김창룡 특무대에 잡혀갈 때 옆집에 평소에 친하게 지낸 김학림대위가 있었고 그런데 박정희는 고문을 당하며 군내에 있는 남로당 조직을 다 폭로하고 주위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나오는데 당시에 남로당에 가입한 많은 장교들이 처형을 당했다. 당시 사형 풍경은 트럭에 실려가 야산에 세워진 말뚝에 눈가리고 손 뒤로 묶여 총살형이 집행 되었다.
이것은 여태 다 공개된 내용들이다. 조갑제 닷컴 대표는 박정희 전기를 쓰며 박정희와 이대생 이현란에 대한 방송을 1년 전에 몇 편에 걸쳐 해 놓은 상태였다.
기자가 체크한 이현란씨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언1>
<참조 2011년까지 대한매일(서울신문 전신)에 있다가 오마이뉴스로 간 정운현 기자가 쓴 기사>)https://www.google.co.kr/amp/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3fCNTN_CD=A0001566819
[발굴] 박정희 '좌익 연루' 수감 때 용산 관사서...생후 6개월 만에 병사
11.05.16 07:42l최종 업데이트 11.05.16 19:18l
이름도 짓지 않고 암 매장
숙군 폭로로 인해 '고(故) 박정희에 대한 저의 원한은 영원합니다'라는 김학림의 부인 강아무개씨가 전운현 기자에게 보낸 편지 뭉치
▲ '추신'에는 이현란이 낳은 아이가 생후 6개월 만에 죽자 용산 관사 뒷산에 암매장했다는 증언(붉은 상자 내)이 실려 있다. ⓒ 정운현
위 기사에서 일부 발췌
"그러던 중에 이여사(李女史/이현란)가 출산(出産)하게 되어서 광화문(光化門) 산부인과에 가서 생남(生男)하여서 제가 며칠 같이 있다가 퇴원하여서 이여사(李女史)는 육아(育兒)에 전념하였으나 약 6개월 후 병명(病名)은 몰랐었지만 사망(死亡)했었습니다. 작명(作名)도 안했었습니다. 그 때 이여사(李女史)가 한 말이 '너는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애비 얼굴도 모르고 죽었느냐'고 하면서 슬피 울었었습니다.
옆 집에 있는 김학림 대위의 부인 강아무개씨는 남편이 곧 석방 될 줄 알았는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난 후 박정희가 고해 바침으로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해서인지 강아무개씨는 "고(故) 박정희에 대한 저의 원한은 영원합니다' 는 말을 편지 끝에 적어 놓고 있다
그 강 아무개씨는 박정희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6개월 뒤에 죽었다고 했다
<증언2>
한편 조갑제 닷컴에서는 '박정희가 사랑한 여인 李現蘭의 生前고백'이 있었다.
이현란씨는 박정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李現蘭씨가 1987년 강인옥 기자에게 털어놓은 유일한 증언
<박정희의 두번째 부인으로 불러야 할 이현란씨는 1987년 60대의 할머니가 돼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작은 식품가게를 꾸려가면서, 며느리도 보았고, 이제는 비교적 담담하게 과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세파를 겪었다. 자유기고가 강인옥 씨가 이 여인과 만나 들은 이야기를 녹음상태 그대로, 될 수 있는 대로 손질을 하지 않고 여기에 소개한다. 이것은 인간 박정희의 숨겨진 면을 이해하는 데 역사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1947년 박경원 결혼식장에서 박정희 대위를 만나게 된 경위: "이효 씨가 신부 측 들러리를 서달라...>
www.chogabje.com
<사진 설명; 이화여대에 보존되어 있는 이현란의 학적부 '보증인란' : 보증인란에 박정희의 이름이 적혀 있고, 관계는 숙형(淑兄·사모할 淑에 나이 많을 兄을 써 '사모하는 사람'으로 풀이됨)이라고 되어 있다.-조갑제 닷컴에서>
이현란씨는 위 기사에서 '1950년 2월6일 편지를 써 놓고 집을 나오는데, 편지에는 ‘그동안 고마웠고 맘이 돌아서질 않으니 날 찾지 말고, 날 찾으면 투신 자살할 것’이라고 썼어요. 시장서 고향 아줌마를 만나 ‘지금 남자는 결혼경력이 있고 거기다가 빨갱이니’하고 푸념을 했습니다. 그 아줌마는 ‘그냥 살지, 여자가 뭐…’라고 했어요.'했고
1950년 6월에 새 남자를 만났고 박정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된다.
한 사람은 아이가 태어나서 죽었다고 했고 이현란 씨는 아이가 없었다고 했는데 강마무개씨는 이현란씨가 산고를 겪는 모습을 상세히 가술한 부분도 있고 "너는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애비 얼굴도 모르고 죽었느냐?"고 하면서 슬피 울었다는 기술도 있다.
이현란 씨는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해 숙군에 걸려 서대문감옥에 간 때 부터 박정희를 싫어 했고 도망 갈려고 가출이 잦았으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 할려는 흔적이 보인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려는 이현란씨에게 아이는 장애물이 아니었을까?
처음 증인 김학림씨의 부인 강마무개씨는 아이가 죽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글쎄이다.
강 아무개씨는 ' 박정희에 대한 저의 원한은 영원합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원한이 있으면 복수를 할 것이고 보통 복수을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상대를 죽여?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무리이고
3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는데 상대 씨를 말려?
아이를 호적에서 없애?
그것도 한 방법이기도 하겠다.
한 여인은 청년 "박정희와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
한 사람은 "아이가 태어나 6개월 후에 죽어 호적에 올리지 못하고 죽어 암매장 했다."
이 말은 ' 박정희에 대한 저의 원한은 영원합니다'는 사람의 말이다.
아이가 있었다, 없었다 중에는 있었다 쪽에 무게가 가고
그 뒤 아이는?
이것은 마치 솔로몬 王 재판 때에 나오는 이야기 같다.
두 여인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 아이는 태어나서 아주 비참하게 버려질 수 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1년 대한매일(서울신문 전신) 에 있다가 오마이뉴스로 간 정운현 기자는 이 아이가 살아 있다면 2011년에 63세라고 했으니 지금 2021년 이니 73세 전후가 되어 보인다.
강남의 모 유명한 기도원 원장이 밝힌 박정희의 살아 있는 아들이 이 아이(지금은 73세 전후)인가?
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첫 아들 찾기에 국민 모두가 조금씩 아는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서 붙이면 찾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