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핵카드를 꺼내든 순간부터 시종일관 미국과의 담판을 요구한다. 미국은 핵문제 해결의 부담을 혼자 지는 것이 싫어서인지 줄기차게 다자간의 협상을 통한 해결을 추구한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믿고 양자대화를 반대하지 않는다. 일본이나 러시아는 한반도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다자의 틀을 지지한다. 우리 정부는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재래식 군비문제는 남북간의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지만,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문제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다. 철저하게 북한의 주장을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강한 의지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6자회담의 틀이 만들어졌고, 한국정부는 마지못해 이 회담에 참여하지만 종속변수(從屬變數)에 머무르고 만다. 북한은 6자회담을 진행시키면서 계속되는 파행과 두 번의 핵실험을 강행한다. 그들의 내심에 다자간 협상의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6자회담의 완전한 파탄을 선언해버린 상태이다. 그러면서 마침내 미국을 양자담판의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뭐라고, 양자가 만나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논의한다고? 미국이 핵실험 도발로 6자회담 테이블을 태워버린 북한과 마주 앉으면서 6자회담 틀을 운운하다니! 이런 식으로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국민을 속이면 안 된다. 북한이 우리를 비롯한 다른 나라를 배제하고 미국과의 담판을 통해 관철하려는 목표는 무엇일까. 제재를 풀고 경제 원조를 얻으며 안전보장을 확보할 목적이라면, 지금의 6자회담이 더 유용하다는 것을 북한이 모를 리 없다. 다른 나라가 줄 수 없는, 다른 나라가 알아서 도움이 되지 않는, 특히 한국을 배제하지 않으면 꺼낼 수 없는, 그 어떤 의제를 내놓고 미국과 담판을 벌여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전략으로 여기까지 온 북한이다. 수백만의 인민을 죽여 가며 만든 대량살상무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북한이 미국에 요구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이다. 몇 푼의 원조, 종이 조각에 불과한 안전보장을 얻기 위해 그 고난의 길을 걸어왔을까. 이는 순진한 환상일 뿐이다. 북한이 내놓을 요구는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한반도의 운명은 한민족에 맡기라고 요구할 것이다. 비록 경제에서는 뒤쳐졌지만, 정치,군사적으로 남(南)을 압도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군을 철수시키기만 하면 북한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1970년대, 미국이나 월맹 모두 전쟁에 지쳐있었다. 월맹의 호지명은 미국을 압박하여 마침내 파리의 협상테이블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미국이 인도지나반도의 종주권을 월맹에 넘기기로 합의를 해놓고서도, 협상대표 키신저가 미국은 절대로 월남을 포기하지 않으며 월맹도 절대로 월남을 침공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미군이 채 월남을 떠나기도 전인 1975년 월맹의 대공세로 월남은 지도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평양의 전략가들은 1973년 파리의 추억에 젖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미국은 큰 나라지만 크다고 언제나 강한 것은 아니다. 월맹이 크고 강해서 미국을 이겼는가. 끈질기게 급소를 물고 늘어지면 큰 나라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선다는 것을 월남전이 보여준다. 또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선택이라도 하는 나라이지, 국제사회의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나라도 아니다. 그래서 북한은 자신들의 전략이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우리 정부가 북한의 이런 전략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알면서 어떤 대응전략을 마련하고 북미 양자담판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지 더욱 궁금하다. 모르고 있다면 이는 소름끼치는 일이다. 북한의 전략을 허망한 환상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 정권은 비상한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단순한 국제문제인가, 아니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한민국의 치명적인 문제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너무도 간단명료하다. 그 대량살상무기는 국제사회에는 골치 아픈 문제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왜 두 전(前) 정권은 이 문제를 국제사회 그것도 미국에 떠 넘기려했던 것일까.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문제의 고삐를 우리가 잡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국회의원 이인제 더타임스 소찬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