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24세였던 그가 이렇게 거북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해군 출신으로 해군본부와 해병대 상륙함인 전남함에서 갑판수병으로 일했다.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은 ‘해군의 혼’이었다. 성의없이 주물로 찍어내고 금박을 입힌 거북선을 보고는 ‘차라리 내가 만들면 더 잘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거북선에 바친 30년 세월이다. 원래 손재주가 있는 그는 당시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무로 거북선을 직접 만들어 보았다. 막상 만들어보니 눈으로 볼 때와는 틀렸다. 노가 몇 개인지, 돛은 몇 개인지, 막연한 생각만으론 도저히 거북선을 만들 수 없었다. 그가 거북선에 대한 기록을 자세하게 살피게 된 것은 조선 태종실록에서였다. 1413년(태종 13년)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연습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거북선이 왜구의 노략질이 가장 심하던 고려 말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제작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실제로 철갑선으로 만들어져 실전에 사용한 것은 잘 알고 있듯이 180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였다. 이순신장군이 지휘했던 거북선, 20문의 대포와 화염을 뿜는 용머리, 그리고 수백 개의 철침을 등판에 박은 거북선은 공격과 수비 모든 면을 완벽하게 갖춘 중세시대 최첨단 전함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당시 임란때 사용된 거북선은 단 한 척도 남아있지 않다. 지난 2월 경상남도가 ‘이순신 프로젝트’의 핵심 사업으로 거북선 인양사업에 도전하고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1973~1978년에도 당시의 문화공보부가 탐사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거북선 고증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전쟁기념관과 독립기념관, 현충사, 해사 등에 복원돼 있는 거북선은 제각각이었다. 목선인 거북선을 청동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고 뱃머리 아래에 있는 귀면(鬼面)을 만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용의 머리에 뿔이 없는 것도 있었다. 임씨 역시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었다. 첫 작품은 5개월 만에 완성했지만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금의 거북선은 그 후 수년에 걸친 연구와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해 완성하게 된 것이다. ‘거북선 재현’에 소명감을 느낀 임씨는 잘 다니던 직장을 아예 그만두고 1997년에 거북선 모형 제작회사 ‘귀선(龜船)’을 설립했다. 가족들이 말릴 법도 했지만 되레 따스한 격려로 그의 용기를 북돋아줬다. 그럴듯한 사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는 집 3층 옥탑방에 작업실을 차린 것이 전부였다. 처음이라 직원 2명을 데리고 시작했지만 작업은 수월하지 않았다. 그의 거북선은 공정이 까다롭고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의 거북선은 실제 크기의 75분의 1, 95분의 1 등으로 한 척 만드는 데 3000여 개의 나무 부품과 100여번의 공정을 거치므로 크기에 따라 1∼4개월이 걸린다. 가격은 한 척에 100만∼800만원. 500여 개의 목재 부품과 568개의 동(銅) 소재부품이 필요하고 거북 잔등의 철갑판에는 1900여 개의 철침을 꽂아 부품 하나하나를 깎고 갈고 다듬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나무 재료는 향나무를 쓴다. 처음엔 공예용 나무인 마티카를 쓰다가 거북선의 질감을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향나무로 바꿨다. 역시 질감을 위해 도장을 하지 않는다. 색을 칠하면 나무 고유의 느낌 대신에 기계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작업으로 전장 45㎝ 거북선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혼자 힘으론 꼬박 석 달이 걸린다. 길이 3㎝ 정도의 철갑판에 철침을 박는 일로 손이 성할 날이 없었다. 무리한 제작 욕심에 몸져누운 날도 많았다고 한다. 팔순 노모 안옥란씨가 보다 못해 철침 작업을 대신 해주기도 했다. 마침내 임씨의 지극한 노력에 보답이 따랐다. 2002~2003년 모형함선 경연대회에서 연이어 금상을 받았다. 2003년엔 조달청 정부조달 물품으로 지정됐다. 이렇듯 장인의 혼을 담은 그의 거북선은 이제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문화관광상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캐나다와 리비아 등의 한국대사관에 진열돼 우리 민족의 뛰어난 조선 기술을 자랑하고 있기도 하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거북선을 보고 찬사를 보내지만 임씨는 일본인들의 거북선에 대한 반응이 놀랍다고 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자신들의 수군을 전멸시킨 거북선을 보는 그들의 시각은 경이롭기만 하다고 했다. 분명히 물건을 만들어 파는 제조업이지만 그의 ‘사업’은 수익성과는 거리가 멀다. 수많은 재료와 긴 작업시간, 그리고 흘리는 땀에 비해 돌아오는 돈은 ‘수입’이라는 표현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래도 임씨는 이 외롭고 고된 일을 계속할 작정이다. 자신이 일을 그만두면 다시 싸구려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져 외국인들에게 조롱받을 수 있다는 걱정에서이다. 이제 그의 작품은 학계의 심사를 거쳐 우수 문화재 상품으로도 지정돼 재외 공관이나 관공서 등에서 우리 문화를 알리고 있다. 그는 앞으로 거북선의 우수성을 체험할 수 있는 초등학생용 ‘조립 거북선 키트’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400여 년 전, 우리의 바다를 지켜 풍전등화 같던 조선을 소생시킨 충무공의 거북선이 서울 변두리의 작은 옥탑방 작업실에서 새롭게 닻을 올리고 있었다. 16세기의 바다가 아닌 21세기 한민족의 가슴을 향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