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趙素昻)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해 단연동맹(斷煙同盟)을 조직해 활동했다.1909년 1월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하고 5월 창간된 대한흥학회보의 주필로 활동했다.1913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개조해 박달학원을 창립하고 청년들의 교육에 힘썼다. 1915년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유도하기 위해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했으며 1917년에는 국내외 동포에게 대동단결선언서를 작성·선포했다.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할 준비로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 주권민유론(主權民有論), 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을 골자로 한 취지서를 작성해 이를 스웨덴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대한국 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1918년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선출되었으며 11월 지린에서 여준(呂準)·김좌진·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 등과 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해 김교헌(金敎獻) 등 독립운동가 39명과 공동서명하여 발표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헌장기초위원, 심사위원, 임시의정원법기초위원, 초대 국무원비서장,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2년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시사책진회를 발기했다. 1926년 삼균제도(三均制度)를 집필해 삼균주의의 토대를 형성했다. 1927년 김구·안창호·이시영(李始榮)·홍진(洪震)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창립하고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9년 3월 순수한 민족주의자의 중심체를 조직하고자 이동녕(李東寧)·안창호·이시영·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의 대외선전과 임시정부의 외교를 전담해 활동했으며 2월부터 이듬해까지 국문판 한보(韓報), 중문판 한보특간(韓報特刊)을 발간해 사설과 특간사 등을 집필해 민족운동론을 설파했다. 1935년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한국독립당 대표로서 신당창립대표위원으로 참석했으며 김규식·김원봉과 함께 규칙제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족혁명당은 당의(黨意)와 당강(黨綱)을 통해 8·15 대한 광복 후의 민족국가 건설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시했고 삼균주의(三均主義) 이론이 반영되어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제시했다. 9월 한국독립당을 재건했다. 한국독립당은 더욱 명백하게 삼균주의에 입각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표방했다.1937년 8월 조소앙의 재건한국독립당은 김구파의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한인애국단 및 미주(美州) 5단체 등과 통합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했다. 1939년 전국연합전선협회가 결성되었으며 그 정강에 삼균주의 정책이 그대로 채택되었다. 1940년 5월 김구의 한국국민당 및 이청천의 조선혁명당과 함께 3당통합을 이루어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창당선언과 정강에서 삼균주의의 정립을 확정시켰다. 1941년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겸 선전위원회 주임위원으로서 삼균주의 원칙에 입각해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기초했다.1943년 4월 한국독립당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8·15 대한 광복 후 개인자격으로 귀국해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47년 2월 비상국민회의 2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국민의회로 개편되자 그 의장에 선출되었다. 신탁통치를 전제로 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참가를 반대하는 등 반탁운동을 전개했다.1948년 3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총선거에 불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4월 7개항의 남북협상안을 발표하고 평양의 남북회담에 참가했다. 10월 한국독립당과 결별하고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인정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