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근대학교 원산학사(元山學舍)는 1880년 4월 개항 이후 원산에 일본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지자 덕원부(德源府)의 주민이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한 학교이며 1883년 8월 28일 덕원부사 정현석(鄭顯奭)은 서부경략사인 어윤중과 원산항의 통상을 담당하던 통리기무아문의 주사 정헌시의 지원을 받아 원산학사를 설립했다. 원산학사는 1904년(광무 8) 원산학교로 개칭되었으며 설립 초기에는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반편성을 했는데, 학생 수는 문예반 50명 정도, 무예반 200명 정도였다.교과과정은 문무반 공통으로 산수·물리·기기·농업·양잠·광채 등 실용적인 과목이 있었고, 특수과목으로 문예반은 경의를, 무예반은 병서를 가르쳤으며 일본어 등 외국어와 법률·지리 등 근대 학문도 포함되어 있다. 1883년 김윤식이 한성에 세운 관립영어학교 동문학(同門學)은 통역관 양성소이며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게 되고 교섭을 갖게 되자 영어를 할 줄 아는 통역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 겸 총세무사로 부임하게 된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통상사무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재동에 동문학(同門學)을 설치했으며 1886년에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생기면서 폐교되었다. 민영익이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뒤 1882년에 영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근대식 교육 기관 설립을 계획했다.1886년에 일류 대학교 출신의 미국인 교사 3인을 초청하여 동문학을 대체하는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설립되었다.1885년 배재학당, 1886년 경신학교와 이화학당, 1887년 정신여학교 등 미션스쿨이 설립되어 영어, 서양의 근대과학, 실용적인 기술 등을 교육과정에 도입했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하여 학무아문에서 교육행정 업무를 전담하도록 했고, 학무아문은 총무국, 성균관(成均館) 및 상교서원(庠敎書院) 사무국, 중학교·대학교·기예학교·외국어학교 및 전문학교를 관장하는 전문학무국, 소학교·사범학교를 관장하는 보통학무국, 편집국, 회계국의 부서가 조직됐으며 소학교·중학교·전문학교·대학교로 이어지는 근대적인 학제를 도입하려 했다. 1895년 2월 26일 고조 광무제의 교육입국조서를 통하여 교육으로 부국강병을 실현하고 민족의 자립을 실현하려 했고 1895년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부속소학교의 설립을 시작으로 관립소학교들이 세워지고 아동들에게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독립협회도 아동과 여성교육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기회를 확대해야 한다는 계몽활동이 이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