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19대 총선에서 피 말리는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당초 민주통합당의 일방적인 승리가 예상됐지만 총선후보자들의 공천과정을 놓고 새누리당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어느 쪽이 승리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팽팽한 접전을 유지하고 있다.특히 양당이 총선에서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은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불과 8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새누리당은 민주당과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초 접전 지역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세종시에 대한 선거 결과다. 지금 세종특별시 국회의원 선거는 충청권 선거 판도의 중심지역으로 떠오르면서 전 국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지역이다.그러다 보니 후보들도 양당에서 거물급으로 공천했다. 충청권 정당임을 자임하는 자유선진당에서는 심대평대표가 직접 나섰고 민주통합당에서는 이해찬 전 총리를 내세워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 새누리당에서는 신진 충남대 교수를 공천했다.자유선진당 후보인 심대평 대표는 고향사람으로서 세종시의 유치를 위해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투쟁해 왔다며 적임자 론을 내 세우고 있고 민주통합당 후보인 이해찬 전 총리는 세
이순신(李舜臣)은 1591년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으며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1592년 음력 4월 13일 일본군 15만 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고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렸다.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다.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언론에서는 안철수 서울대교수가 마치 대한민국 절대구세주라도 되는것처럼 마구 호들갑을 떨고 있다.과연 그러한가? 대한민국과 전국민들을 진정 책임질수 있는 사람인가?그렇다면 구체적인 증거를 한번 말해보시라...어렵고, 복잡한 국정현안에 대해...골머리를 싸매고, 몇날며칠 고뇌를 한적이 있는가?아니면 전국을 다니면서 비라람 황사먼지 맞아가면서...국민들을 상대로 진정성 있는 유세를 한번 한적이 있는가?참 대한민국 언론들 ...정말 어이가 없다.그저 언론 입맛에 맞으면...국정경험이 있던...없던... 국민상대로 언론권력을 이용해 선동질하고 있으니... 이들이 진정 대한민국을 걱정하고 국민들을 생각하는 언론들인가?자동차 운전도...최소한 면허증을 획득해야하고... 그리고 주행교육도 받아도..‘초보운전’이란 스티커를 부착하고 다닌다.그저 부모 잘만나서..돈있고, 거기다가 머리가 좋아...서울대교수에다...MB정부 무슨위원장직까지 꿰찼다고...대한민국 정치지도자가 될수 있다고 호들갑 떠는 언론들을 보면 정말 머리가 아프다.운전면허도 획득하지 않는 사람에게....대한민국 국가를 맡기겠다고 나선 언론들... 대한민국 현실을 정말 모르는건가? 아니면 모른척하는건가? 정말 해
정약용(丁若鏞)은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집필하였고 규장각(奎章閣)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예문관 검열,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4년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음력 10월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였고 1799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병조 참지(參知), 좌부승지를 지냈다.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인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유배(流配)되었고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에서의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저술 대부분의 집필이 이루어졌다.
백관수(白寬洙)는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소식을 접한 일본경찰이 기독교청년회관을 난입, 독립선언 저지와 이를 가로막는 학생들과의 격투가 벌어졌고 삽시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백관수의 낭독은 계속 되었고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 사회자 윤창석의 기도로 폐회하였다. 현장에서 일경에 연행된 백관수는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고 2·8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1925년 5월 김준연(金俊淵)·안재홍(安在鴻)·백남훈(白南薰) 등과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만들어 민족운동의 조직을 육성하려 했다. 연정회와 태평양문제연구회를 단일화하는 등 민족진영 단체를 통합하려 하였다. 1927년 2월 좌·우 이념을 초월한 민족단일단체으로 신간회가 출범할 때, 백관수는 조선일보사 대표로 참가했다. 1927년 여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 기독교 청년회 주최 2차 태평양 회의에 이상재가 운영하던 조선일보 편집인으로 조선일보 대표자격으로 참석하였다.1928년 조선일보 사설 ‘보석(保釋)지연의 희생’이 문제가 되어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 주필 안재홍과
김성수(金性洙)는 1915년 4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을 강조하였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 초 그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을 준비했다.3.1 대한광복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송진우가
조도선(曺道先)은 1895년 러시아로 건너가 이르쿠츠크 등지에 머무르면서 세탁업, 러시아어 통역 등에 종사하다가 1909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하얼빈(哈爾濱)으로 갔다. 10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대장대신(大藏大臣)과 회견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기회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것을 결심하고, 안중근(安重根)이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에게 조력을 요청하자 쾌히 승락했다. 조도선은 우덕순(禹德淳)·유동하(劉東夏)와 함께 채가구역(蔡家溝驛)에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면 거사하기로 하고,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거사하기로 약속한 후 대기하고 있었다.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여 미수로 그쳤으며 하얼빈 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했고 체포되어 뤼순(旅順)에 있는 관동도독부감옥서에 이송되었다고 1910년 2월 14일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우덕순(禹德淳)은 1905년 겨울 연해주로 건너가 북간도관리사(北間島管理使)를 지낸 이범윤(李範允)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의병을 조직, 항일전을 준비하였다.1908년 여름 의병대 참모총장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과 회령 지방 등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왜병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09년 봄 다시 러시아로 건너가 연추(煙秋)에서 안중근·김기열(金基烈)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여 함께 결사보국을 맹세하였다. 담배 행상 등을 하며 자금을 모았고, 연해주를 돌아다니며 동지들 간의 연락을 취하였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듣고 함께 거사할 것을 약속하였고 유동하·조도선도 동행하여 간도 하얼빈으로 가서 이토 히로부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안중근, 유동하, 조도선 등과 같이 하얼빈 일대를 각자 영역을 정해서 담당구역에 나타나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담당구역은 하얼빈 역, 우덕순의 담당구역은 채가구(蔡家溝)역이었으므로 각자의 구역에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10
송시열(宋時烈)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 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장령에 등용되어 세자시강원 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 )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 )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다가, 김자점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빌미로 조선의 북벌 움직임을 청에 밀고하여 효종이 청에게 추궁을 당하자 영의정 이경석 등과 함께 다시 물러났다. 그뒤 충주목사·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1658년(효종 9)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1차 예송(
윤휴(尹鑴)는 1660년(현종 1)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송시열 등 서인이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여 시행하자, 삼년상을 지내자는 참최설(斬衰說)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국에서 참최설은 남인의 서인 공격에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는데, 기년복제는 왕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사대부의 예(禮)를 왕에게 잘못 적용하여 왕의 지위를 낮추고, 왕의 법통을 둘로 나누어버리는 논리이므로 어떤 경우든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675년(숙종 1)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일어난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한 뒤,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자,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을 이끌며 활동했다. 이해 승정원 동부승지·이조 참의·대사헌·성균관 좨주 등을 두루 거쳐 이조 판서에까지 승진했다. 이후 대사헌·좌참찬·우참찬·형조 판서·우찬성 등을 번갈아 역임했다.재직중 지패법(紙牌法)·호포법(戶布法)·상평법(常平法) 등 부세제도 개혁안을 여러 번 제기했으나 지패법을 변형한 호패법(戶牌法)만이 시행했다. 도체찰부(都體察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