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 음모가 진행되면서 정∙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60년 2월 28일 대구시내 수성천변에서 자유당의 부정과 부패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왔던 것이다. 독재에 움추렸던 언론도 마침내 2∙28 학생의거를 보도함으로써 전국의 학생들이 잇따라 궐기했고 시위에 나서게 되어 마산 3∙15의거를 촉발시켰고 4∙19와 이승만대통령의 하야와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이끌어 내는 민주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
-2.28 학생운동이 올해 48주년을 맞는데 올해의 의미를 정리해 주십시오. “2∙28 대구학생의거는 마산 3∙15의거,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인 4∙19민주혁명을 이끌어낸 시발점이 된 역사적 사실로 바로 대한민국 건국 이래 반독재 민주운동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청년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서 사회 전 부분의 민주화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이시대의 의제를 새로이 형성시켜 시민정신운동으로 승화하여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도약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퇴색되어 가는 2.28정신을 지속적으로 계승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이 운동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서 일어난 청년 학생의 자주적 저항운동으로 이후 6-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개발독재와 경제성장의 시대를 거치고 7-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2∙28 세대가 적극적 역할을 다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2∙28 민주운동의 정신은 청년 학생 스스로 불의에 항거한 저항정신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정착화 시키는데 기여한 점은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대구 2.28 민주학생운동’에서 최근 ‘대구’를 뺐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전에 2・28 대구민주운동기념사업회란 사단법인 명칭을 쓰다가, 작년 기념사업회 정기총회에서 (사)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로 법인명을 변경했니다. 2∙28학생의거가 대구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대구지명을 넣었으나, 대구뿐만 아니라 대구∙경북권과 전국으로 확대하여 기념사업을 펼치기 위해 지명을 뺐습니다” -대구시 중구 공평동에 2.28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원래 이 자리는 1995년 폐교된 대구중앙초등학교 자리였는데 대구시의 중심가이고, 2∙28 당시 경북지사 관사, 경북도경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김대중대통령이 40주년 기념식때 예산지원을 약속했고 그후 2004년 2∙28기념 중앙공원으로 준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산부족으로 2∙28기념관과 조형물등 상징성이 있는 공간으로 완성되지 못해 의미를 주는 것이 많이 부족한 사실입니다” |
“저는 경북대학교 교수로서 대구흥사단 대표 등으로 활동을 하다가, 2005년에 부의장, 2007년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2․28 기념사업회가 시민사회와 더 가까이에서 함께 하려는 시민사회와 지역의 선․후배들의 요구가 작용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현재 저는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공동의장 외 경북대학교 교수회 의장, 전국 국공립대학교수연합회 상임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28 당시 활약했던 참가자들의 현재 활동여부가 궁금합니다. “2∙28 주도세대가 1942, 43년생이다 보니 현재는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한 상태라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기념사업회의 이사 또는 회원으로서 도움을 많이 주고 있고, 2∙28기념사업회의 사무총장으로 현재까지 열심히 참여하고 계시는 박명철(당시 대구공고 2∙28주도)씨 같은 분이 있습니다” -48주년을 맞아 의미있는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2∙28 48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 경북 시, 도민 자전거행진, 걷기대회와 마산 3∙15, 4∙19와 함께 할 수 있는 전국 이어달리기의 성화(횃불) 채화. 그리고 2∙28 후원의 밤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안에 2∙28 기념관 건립을 위해 예산을 확보하고 2∙28 민주운동 법적지위확보를 위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개정에 힘을 모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