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상(張建相)은 1916년 상해(上海)의 신규식(申圭植)으로부터 함께 일할 것을 희망한다는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이후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교육을 지원하였고, 동제사를 확대 개편시킨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동제사의 회원으로서 1917년 간도 안동현(安東縣)에 파견되어 영국상선 안동지사장 죠지 쇼우와 친교를 맺으면서 국내로부터 오는 김두봉(金枓奉), 김원봉(金元鳳)의 길 안내역을 수행했다. 김원봉과는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쌓으면서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창설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19년 3월 3·1 대한광복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을 위한 지원단체인 한인거류민단의 국민대회 준비위원에 선출, 김규식(金奎植), 여운형,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정 외무부(外務部) 외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임정의 외교활동을 수행했으며 여운형의 후임으로 임정 외무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7월 1일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를 부활시키고, 대한적십자사 상의원(
여준(呂準)은 북간도로 망명하여 1906년 이상설(李相卨)·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 등과 함께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해 교포 자녀들의 항일민족교육에 힘썼다.1907년 4월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는 특사 이준(李儁)을 안내해 이상설과 만나게 했다. 1912년 가을 퉁화현 합니하(哈泥河)에서 허혁(許赫)과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해 이주동포의 자활과 교육을 맡아보았다. 1913년 신흥학교(新興學校)의 교장으로서 교감 윤기섭(尹琦燮), 학감 이광조(李光祖) 등과 학교의 발전에 전력을 다했다. 정안립(鄭安立)·박찬익(朴贊翊)·정신(鄭信)·류동열(柳東悅)·신팔균(申八均)·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 39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남간도 교포들의 명의로 된 한국독립청원서를 중국정부를 거쳐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다. 1919년 3월에는 박찬익 등과 지린 군사독판부를 조직해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인가를 얻어 설립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부독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12월 임시정부 간서총판부를 설치하고 총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1년 5월에는
[더타임스 이종납 편집장] 박근혜를 지지하는 수많은 지지자들은 다음 대통령은 ‘박근혜’라는데 이견이 없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하늘이 점지해 놓은 상태라고 확신하고 있다. 대단한 신앙에 가까운 이야기다.그런데 안타깝게도 결론적으로 말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번 4.11 총선에서 최대 격전지가 될 수도권 출마를 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고대해 왔던 ‘대권’은 그야말로 ‘아리송해’다.지난 대선 이후 ‘나홀로’ 고공비행을 해 오며 대세론을 형성해 왔던 박근혜 위원장이 최근 몇몇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노무현 재단 이사장에 뒤지고 있고 안철수 서울대 교수와의 양자대결에서도 뒤진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다자구도에서는 박 위원장이 ‘안철수-문재인’에 다소 앞서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야권 지지층이 안철수-문재인으로 분산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안심할 처지가 못된다.필자는 1년 전 이 칼럼에서 박근혜 대항마로 문재인의 등장을 예고한바 있는데 문 이사장이 민주당과 시민사회 등 제세력이 망라한 범야권통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통합에 성공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또 야권취약지인 부산지역에 본인이 총선 출마를 선언한데 이어 거물급 주자들을 부산경남지역으로 끌어들여 총선승리에 대
이장녕(李章寧)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07년 일제가 군대를 강제 해산하여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황실의 친위대에 편입되었으나, 그는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어서 이상룡과 이회영 형제들, 김동삼, 이동녕 등이 뒤따라 망명했고, 이들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무장 독립 운동가들을 양성했다.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이후 설립된 서일의 군정부 참모장을 맡았고, 이 기관이 북로군정서로 확대 개편되었을 때도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북로군정서는 1920년 대한독립군 등 다른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는데, 이때 이장녕은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 영내로 이동했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 운동가들이 다수 사망하고 서일이 자결하였다. 이장녕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독립 운동 단체 통합을 위해 지린에서 열린 전만통일회의주비회 주비회장을 맡아 신민부를 조직했다. 1930년 김좌진 암살 이후 홍진의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고 한국독립군도 조직했다.
조명하(趙明河)는 신천군청에서 일하던 중 독립 운동의 뜻을 품었다. 황해도 출신의 독립 운동가들인 안중근, 김구, 노백린과 송학선의 창덕궁 앞 사이토 총독 암살 미수 금호문사건(金虎門事件)의 영향을 받았다.1926년 9월 일본의 오사카 시로 건너가 야간학교를 다니며 고학을 했다. 그해 말에는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도 일어났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먹고 1927년 11월 중간 기착지로 대만에 들렀다.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인 육군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검열사로 타이완에 온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했다.조명하는 칼 쓰는 법 등을 익혀 준비한 뒤 1928년 5월 14일 독을 바른 칼을 들고 구니노미야의 행로에서 인파에 묻혀 대기하다가, 그가 무개차를 타고 지나가는 순간 차에 뛰어들어 독검으로 찔렀다.조명하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7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은 뒤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윤세주(尹世胄)는 1919년 한성에서 3·1 대한광복운동에 참가한 뒤 고향에 내려와 밀양 지역 대한광복운동을 조직했다.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19세로 나이가 어린 편이었지만 윤치형 등과 함께 대한광복운동을 주도했던 것으로 드러나, 궐석재판에서 밀양 대한광복운동과 관련자들 가운데 가장 중형인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았다.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김원봉이 그해 11월 결성한 의열단에 가입했다. 주요 기관에 폭탄 투척으로 테러 행위를 벌이기로 한 의열단의 윤세주는 신철휴, 윤치형 등을 국내로 파견되었으며 체포되어 1927년에 출옥했다. 1932년 윤세주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난징의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 전선을 구축한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에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등과 함께 핵심 인사로 참가했다. 이 조직에는 김구 계열을 제외한 좌우익의 많은 운동 단체들이 참여했으며, 1933년 발족한 민족혁명당의 모체가 되었다.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민족혁명당 편찬위원회 등에서 일하였다. 1941년 박효삼과 함께 화베이 지방으로 북상하여 팔로군과 공동으
411에 실시하는 국회의원 후보공천 신청접수가 6일부로 시작되었다.새 누리당과 민주통합당에서는 공천신청자들에 대한 자당의 내부적 기준을 정해 놓은 것 중에 현역의원 노령자들에 대한 공천 배제 설이 흘러나오면서 부터 해당의원들은 몹시 당황하는 분위기이다.모당의 의원께서는 대한노인회에 협조문을 보내서 노령자배제 반대를 위한 역할을 해 줄 것을 로비하였다는 것이다. 즉! 대한노인회 측에서 노령자 각당의 공심위는 노령의원후보에 대한 카트라인을 철폐하라는 성명서를 각 언론에 발표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이에 대한노인회 측 모 임원의 이야기로는 노령의원으로 해당되는 각 당의 의원65명의 지지 서명을 먼저 받아 오도록 주문하였다니 참으로 올바른 판단과 소신 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고 싶다.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노인이라고 국회의원을 하지 말라는 법률적 근거는 없다. 그러나 현직 생활을 잘 마무리 하고 은퇴한 후 조용히 생을 지내고 있는 어르신들에게 권력의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유행병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아울러 정치 불신 사회에서 신뢰받는 정치판을 만들려면 청렴하고 참신성 있는 젊은 사람들이 이번 기회에 많이 나서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나철(羅喆)은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으나, 강진의 오기호, 부안의 이기 등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조직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한 단식농성을 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을사늑약이 늑결된 뒤에는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철은 이후 점차 한일 강제 병합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민족 종교 운동으로 관심을 돌려 1909년 1월 15일 한성부에서 대종교를 창시했다. 경술늑약 이후로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간도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 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수행하다가 자결했다.
정인보(鄭寅普)는 1913년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했다.귀국한 뒤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며 저술 활동을 했다. 일제 총독통치 말기에는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저항하여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은둔생활을 하다가 1945년 8월 대한 광복 후에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냈다. 광복 초에 정인보는 광복절노래를 직접 짓기도 했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여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발, 강력한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1946년 조선사연구를 저술했다.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정인보는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에 의해 삼고초려로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임영신의 독직 사건을 두고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김육(金堉)은 1605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1605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른바 5현을 문묘에 모시는 5현 종사를 건의하였다. 1611년 정인홍 등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부황에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퇴교당했다. 이후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潛谷里)로 낙향,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조정에 나가 의금부 도사가 됐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피난했다가 돌아왔으며, 환도 후에 음성 현감으로 부임하였다.1624년(인조 2년)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정언에 임명됐다가 1633년 안변 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였다.1636년 명나라에 파견될 성절사(聖節使)로서 연경에 갔으며, 1637년 명나라에서 병자호란의 발발과 인조의 항복 소식을 접하였다.명나라에 다녀와서 남긴 조천일기(朝天日記)에는 그가 직접 목격한 명나라 관원의 타락과 어지러운 사회 분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