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黃玹)은 1875년 한성에 와서 이건창(李建昌)에게 시를 추천받아 당시의 문장가이며 명사인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정만조(鄭萬朝)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건창·김택영과는 그후 스승과 친구 사이로 평생 동안 교유하며 지냈다. 1883년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나 시관(試官) 한장석(韓章錫)이 2등으로 내려놓자 회시(會試)·전시(殿試)를 보지 않고 귀향했다. 구례군 만수동(萬壽洞)으로 옮겨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888년에 성균관 회시에 응시,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껴 관계 진출을 완전히 단념하고 1890년에 다시 귀향했다. 만수산에 구안실(苟安室)을 짓고, 3,000여 권의 서적에 파묻혀 두문불출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만 전념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사실상 국가의 주권이 상실되었다고 보고, 중국 화이난 지방에 있던 김택영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0년 8월 경술늑약 늑결 소식을 듣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9월 10일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했다.
이인영(李麟榮)은 1895년 미우라 일본 공사에 의한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여주를 기반으로 거병하였으나 의병의 무력으로는 일본군을 당하기 힘들었고,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이인영은 의병대를 해체하고 문경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10년 후인 1905년 을사늑약 늑결 이후 또다시 전국적으로 을사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대를 조직한 이은찬의 권유로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을 맡으며 다시 격문을 뿌리고 거병하게 되었다. 의병을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의병 조직은 한성부로 진공할 계획을 세우고 연합군인 13도 창의군을 구성했다. 허위와 함께 연합군 결성을 주도한 이인영은 13도창의군의 총대장에 올랐다. 그의 휘하로 모여든 의병의 숫자는 약 8천여 명이었으며 허위, 민긍호, 이강년 등 유명한 의병장들이 함께 했다.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은 결사대원을 선발하고 격문을 외국 영사관에 전달한 뒤 양주에서부터 한성 진공을 개시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퇴하였다.
시험불안 탈출법느긋한 마음으로 칭찬과 격려를 해주자.증상이 심할 때는 단기간 약물복용도 도움된다.-수능시험이 다가올수록 가중되는 스트레스와 불안감. 이로 인해 집중력 감퇴는 수험생활 마무리를 방해하는 주범이다. ‘입시스트레스증후군’, ‘고3병’, ‘재수병’ 이란 입시병은 의학 사전이나 의학 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사회교육제도 하에서 자연적으로 발생 및 탄생한 질병용어로 외국 문헌에는 단지 ‘시험불안(test anxiety)정도로 알려져 있다.시험불안의 원인은 수험생과 학부모 측면 모두에게 살펴보아야 한다. 대개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매사에 완벽하고 꼼꼼한 강박 성향을 띄고, 경쟁심이나 욕심이 많은 학생들은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또 자녀에게 거는 기대가 높은 ‘과잉 기대형’ 부모이거나 자신의 열등감을 아이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과잉 보상형’ 부모도 지나치게 아이의 성적에 집착하고 성적이 떨어졌을 때 심하게 아이를 다그치기 때문에 시험불안을 초래한다.시험불안의 증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신체적 증상-과도한 긴장으로 인해 자율 신경계가 항진되어 여러 증상이 나타난다. 자주 머리, 배가 아프다거나, 어지럽
우리 속담에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강한 자들끼리 싸우는 통에 아무 상관도 없는 약한 자가 중간에 끼어 피해를 입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풀이다.그런데 10월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두고 고래 싸움이 아니라 새우 싸움에 고래 등이 터질 일들이 생길까 초유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아무래도 선거사상 유래 없이 대한민국이 한 바탕 난리가 생길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선거철 마다 잠복 중이던 20대에서 40대 들이 요즘생계일보다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뛰어든 시민 대표 박원순 과 모처럼 총 결집하여 사생결단을 내려는 한나라당의 나경원 후보에게 뉴스 판의 초점이 가고 있음이다.모처럼 흩어진 보수 대 결집과 친이 친박이 하나로 모인 것은 4년 전 있었던 대통령선거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 동안 한나라당은 크고 작은 보궐선거에서 늘 야당에게 참패만 당해 왔기에 당의 해체론 까지 나올 정도로 갈등속의 두 가족이었다.민주당 역시 친 노 그룹과 호남 적통끼리의 암투가 시소게임처럼 진행되어 왔었다. 이런 현상들이 조직을 가진 정당 보다 개인인기가 높았던 안철수 같은 학자가 등장함으로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는 찰나에 벌어진 시민대표
허위(許蔿)는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의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에 분개해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을미독립운동에 나섰으며 경상도에서 이기찬, 이은찬 등과 함께 두 차례 의병을 일으켰다.대한제국 고조 광무제는 허위를 등용하여 성균관에 기용했는데, 1904년 사법 기관인 평리원의 재판장 서리가 되었다. 이해 한일의정서 강제 늑결 사건이 일어나자 이상천, 박규병 등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면서 저항했다. 1907년 고조 광무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국의 의병부대들이 양주에 집결하여 한성 진공을 노렸을 때 이인영을 총대장을 삼아 출범한 의병 연합군 13도 창의군에서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을 맡았다. 허위의 부대는 한성 근교까지 진군하여 패퇴하였으나 조인환, 권준 등과 연합하여 유격전을 벌이면서 계속 저항했고, 이강년, 류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결사 항전을 주창한 강경파로 활동하였으며 1908년 양평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박상진(朴尙鎭)은 영남 지역의 명망있는 유학자로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가 사형당한 허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910년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졸업하면서 신학문도 익혔다. 졸업후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을 거절하고 1911년 영남 지역의 유학자 출신으로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을 위해 간도로 건너간 망명자 허겸,이상룡,김동삼, 손일민,김대락을 만나러 갔다. 귀국한 뒤에는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창춘 상원양행, 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고, 1915년에는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조직해 활동했다. 계몽 운동가 중심의 조선국권회복단은 채기중 등이 결성한 의병 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상진은 이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다.대한광복회의 강령은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 받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그는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어윤중(魚允中)은 1877년 홍문관 교리를 거쳐 전라우도 암행어사에 임명된 뒤, 만 9개월 동안 전라도 일대를 돌아보고 12개조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전라도 지방의 문제가 주로 수취제도의 문란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잡세의 혁파, 지세제도의 개혁, 환곡제도의 폐지, 삼수포세의 폐지, 재결감세(災結減稅) 등 제반 수취제도의 개혁을 주장했고 궁방전과 아문둔전의 개혁, 지방수령의 5년임기 보장, 도량형의 통일, 조운선(漕運船) 제조, 역로제도(驛路制度) 개혁 등을 주장했다. 1881년 조정에서 신사유람단 60명을 일본으로 파견할 때 박정양(朴定陽)·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반장인 조사(朝士)로 선발되었다. 유길준(兪吉濬)·유정수(兪定秀)·윤치호(尹致昊)·김양한(金亮漢) 등의 수행원과 통역관·하인을 거느리고 부산을 출발하여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약 3개월에 걸쳐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설·문물·제도 등을 상세히 시찰하고 많은 참고자료를 수집했으며 다른 조사들은 같은 해 7월에 귀국했고 수행원인 유길준과 윤치호를 일본에서 더 공부하도록 남겨놓았다. 청에 파견한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과 합류하기 위하여 일본을 떠나 9월 상하이를 거쳐 톈진에 도착했다. 어윤
홍영식(洪英植)은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파견되자 조사(朝士)로 선발되어 일본에 갔고 일본의 육군을 담당하여 일본육군총제(日本陸軍總制)·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을 작성했다. 귀국 후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로 총리국(總理局)을 관장했다. 1882년 홍문관 부제학·규장각 직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부호군(副護軍)으로 난의 수습을 담당했다. 그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설치되자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를 거쳐 이조 참의가 되었다가,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 1883년 6월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을 수행하여 미국에 다녀왔는데, 이때 미국에서 신품종의 농작물과 농기계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884년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고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3월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설치되자 총판(總辦)이 되어 우정사업을 담당했다. 김옥균 등과 함께 정권을 장악할 것을 모의하여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
민영익(閔泳翊)은 187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조참의를 거쳐, 1879년 도승지·호조참판에 이르고 1880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經理統理機務衙門軍務司堂上), 별기군의 교련소당상을 역임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 때까지 윤웅렬(尹雄烈)과 함께 별기군의 책임자로 있었다. 제물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으로 사절단을 파견할 때 김옥균과 비공식 사절로 동행하여 일본의 개화된 문물을 보고 돌아왔다. 이후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로 톈진에 파견되어 해관 사무를 교섭했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다음해 5월 주한공사로 L. H. 푸트가 조선에 오자, 조선 정부는 친선 사절로 보빙사(報聘使)를 미국에 파견했다.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여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유길준 등 8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83년 7월 하순 인천을 출발해 나가사키·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9월 18일 미국 대통령 C. A. 아서를 접견하고 국서를 전달했다. 민영익은 보스턴으로 가서 세계박람회와 공공기관을, 뉴욕과 워싱턴에서 정부기관을 시찰하면서 미국 제도에 관한 각종 지식을 습득했으며 우정국(郵政局) 설치, 경
묄렌도르프는 1882년 12월 27일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참의(參議)로 임명되어, 독일 태생의 서양인(西洋人)이 조선(朝鮮)의 고급 관리가 되었고 1883년 1월 12일 통리아문이 외부(外部)에 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확대되자 협판(協辦)으로 승직(昇職)해서 해관(海關)과 변관(邊關) 업무를 총괄하는 정권사(征權司)의 책임자가 되었다.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우두머리는 독판(督辦)이고 책임자로 5인의 협판(協辦)이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協辦)의 자격으로 어명에 의해 1883년 4월 24일 조선해관(朝鮮海關)을 창설하고 박동(薄洞)에 해관(海關) 본부를 정했다. 1883년 7월 25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督辦) 민영목(閔泳穆)은 일본 공사 다께조에(竹添進一朗)와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과 해관세칙(海關細則)을 조인(調印)했고, 11월 3일부터 실행된 것으로, 일반상품의 관세율이 8% 수준을 유지했다. 9월 19일부터는 인천, 부산, 원산 등지의 개항장에 감리(監理)를 두어 해관(海關) 업무를 감독하도록 했다.총세무사(總稅務司) 메릴(Merrill)은 1885년 10월 부임해서 12월 해관(海關) 본부